​이재헌 목사의 칼럼

참 생명의 회복을 소망하는 새과천교회 성도들의 기도제목

2020. 4. 12

만물의 주인되신 전능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 지속적인 전염병의 고통이 온 지구상을 뒤덮은 어둠의 시간들이 이어지는 이 시점에서 두려움과 불신에 이어 외면의 담벽을 쌓아가는 이 땅을 긍휼이 여기시며 생명과 사랑의 회복이 속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1. 긍휼을 구하며 회개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들이 우연히 다가 온 것이 아닌 하나님을 거역하며 불순종한 우리의 죄악을 슬퍼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주신 사랑의 경고임을 인정하며 겸손한 심령으로 회개하오니, 따뜻한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의 손을 얹으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힘들고 답답하며 조급한 현실을 단순히 바이러스로 인한 상황적 아픔으로만 돌리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더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잃어버린 거룩을 회복할 수 있도록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옵소서.

 

2. 질병의 고통 속에 있는 자들과 그 가족들을 보호하소서.

만병의 치료자가 되시는 우리 주님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 중에 있는 자들에게 온전히 나을 수 있도록 은혜 베푸시며, 이 질병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자들을 위로하시며, 더 이상 질병의 고통에 두려워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평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바이러스와 싸우며 환자를 보호하고 질병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고의 땀을 흘리는 귀한 의료진들과 여러 일꾼들에게 갑절의 건강과 견디며 수고할 수 있는 평강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3. 우리나라를 지켜주옵소서.

질병으로 인한 혼란과 정체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지혜와 능력을 정치,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허락하시며, 이 난국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사리사욕과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자가 한 사람도 없도록 서로를 생각하며 돌아보며 사랑하는 이웃들이 되게 하옵소서.

 

4.

교회를 지켜주옵소서.

건강을 좀 먹는 바이러스처럼 진리를 좀 먹는 이단의 세력으로부터 주님의 몸된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도록 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 주옵소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단의 악한 모략과 선동과 침투로 인하여 혼란해지지 않게 하시며, 비난과 조소와 오해로 인한 사회적인 핍박들을 지혜롭게 이기며 세상의 소금과 빛의 본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당 건축이 막 시작되는 중요한 시점에 믿음의 한 지체인 우리 성도들이 마음껏 얼굴을 함께 보지 못하지만 기도로 하나가 되어 이 큰 일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게으름과 나태함과 안일함의 우상에 빠져서 무관심의 구덩이에 빠지는 어리석은 자가 없게 하옵소서.

공사의 모든 일정들이 순적하게 진행되게 하시며, 어떤 막힘과 위험의 요소들도 없게 하옵소서. 과천과 주변 도시, 그리고 온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선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교회로 한 걸음 더 성숙하게 하옵소서.

 

진정한 회복을 소망하는 새과천교회 성도들의 기도제목

2020. 3. 15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 갑작스러운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고통하며 신음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 땅, 이 백성을 살피시고 긍휼의 손으로 치유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1. 긍휼을 구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모든 문제들 앞에 겸손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교회와 가정과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의 시간을 갖게 하시며, 이 질병으로 야기된 사회적인 불안과 불신, 일상적인 생활과 경제적인 문제들이 더 이상 어려움에 빠져들지 않도록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2. 회개의 심령을 주옵소서.

힘들고 답답할수록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시고 육체를 괴롭히는 바이러스와 더불어 영혼을 병들게 하는 이기심, 음란, 탐욕, 비난과 같은 어둠의 일들을 회개하며 모든 종류의 악에서부터 돌아서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의 두 손을 모으게 하옵소서.

 

3.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과 그 가족들을 보호하소서.

만병의 치료자가 되시는 우리 주님의 손길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 중에 있는 자들에게 신속히 나음을 허락하시고, 함께 고통당하는 가족들을 위로하시며 회복의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4. 방역과 진료를 위해 수고하는 자들을 위로 하옵소서.

사명감을 가지고서 이 난국의 중심에서 수고의 땀을 흘리는 귀한 일꾼들에게 갑절의 건강과 견디며 수고할 수 있는 평강의 마음을 허락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더하여 주옵소서.

 

5. 우리나라를 지켜주옵소서.

질병의 혼란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지혜와 능력을 정치,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허락하시어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나가게 하시고 사리사욕에 메이지 않고 핑계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세워가도록 모두의 가슴에 함께 하여 주옵소서.

6. 이단 세력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신천지와 같은 이단 세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모략과 선동과 침투로 인하여 피해 받지 않도록 지켜주시오며, 미혹의 영들과 그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서 악한 거짓의 영들이 무너지게 하옵소서.

 

7. 우리교회를 붙잡아 주옵소서.

예배당 건축이 막 시작되는 중요한 시점에 성도들이 얼굴을 함께 보지 못하지만 기도로 하나가 되어 이 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적하게 진행되게 하시며, 어떤 막힘의 요소도 없게 하옵소서. 과천과 주변 도시, 그리고 온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선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교회로 한 걸음 더 성숙하게 하옵소서.

 

​사회적 거리

2020. 3. 8

‘COVID 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연일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다중 시설과 모임을 피하고 심지어 종교행사까지도 참여를 자제하라고 권하고 있다.

 

최근에는 예전에 많이 사용하지 않던 단어들이 반복해서 들려 오기도 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단어가 ‘사회적 거리’라는 말이다. 이 ‘사회적 거리’란 생소한 단어는 영어로 ‘스트레이트 암(straight arm)’이라 하는데 그것의 원 뜻은 ‘곧게 쭉 편 팔’이란 뜻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적절한 ‘개인 간의 거리’(Personal space)를 두고 지키라는 것은 요즘과 같은 사회적인 상황 가운데서는 타당한 이야기 일수 있다. ‘개인적 거리’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이 '숨겨진 차원'이란 책에서 소개한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공간은 인간관계에 따라 몇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친밀한 관계'는 가족이나 연인 사이의 관계이고 조금의 거리 곧 0~46㎝를 둔다. ‘개인적 거리’는 친구와 가까운 사람 사이로 간격이 46~120cm이다. 타인에게서 침범 받고 싶지 않은 물리적 공간을 뜻한다. 

 

‘사회적 거리(120㎝ 이상)’는 사회생활을 할 때 유지하는 거리다. 업무상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지키는 거리다. 제 3자가 끼어들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공간이다. 코로나19가 밀접 접촉으로 감염된다고 알려지면서 사회적 거리가 주목받는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경우 비말(飛沫)이 튀는 거리가 최대 2m 정도라고 알려졌고, 그 피해와 유행을 최소화하기 위해 손 씻기 등 개인위생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회적 격리라고 한다.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그만큼 심리적 거리감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러스와의 대결에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은 어느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하나님과는 그렇게 거리를 두어서는 결코 안 된다. 주님과는 밀착 동행해야 한다. 항상 주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헤아려 보아야 한다. 또 교회에서는 모처럼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 대화하며 가까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마스크를 착용하고 50센티 이상을 떨어져도 된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경제적 손실을 작게 할 수 있다. 모두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지 않고, 은행도 가지 않고, 전철타고 직장에 가지도 않고, 외식하러 가지도 않는다면 경제적 손실은 더 크게 될 것이다.

 

‘COVID 19’가 가져다주는 손해는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이러스에 대한 지나친 공포감과 불안감을 벗어나도록 정신적으로 중무장해야 한다.

 

세상은 사회적 거리를 추천하나 주님은 밀착 동행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당신과 동행하기 원하신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잠언13:20)

 

국가적 비상 상황과 공 예배에 대한 신학, 목회적 성찰

2020. 3. 1

1.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빠른 전파로 인해 한국 사회 전체가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지역 감염이 현실화 된 상황에서 급기야 주일예배를 취소하고 온라인 예배 등과 같은 대체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요구로 인해 가정예배, 인터넷을 통한 예배 등을 시행하면서 한편으로 이 현상이 주일 성수와 공예배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게 된다는 우려가 너무나 크다.

 

2. 신앙생활에 있어서 공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체적인 한 장소에 모여서 유일하시고 참되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다(신4:10).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마18:20), 즉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시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 따라서 성도는 모이기를 폐하지 않고 힘써 모여야 한다(히10:25). 우리 신앙고백서도 신자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지만, 공적 집회에서 더 엄숙하게 예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집회를 임의로 소홀히 하거나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1:6). 그러므로 성도는 질병 혹은 감염의 이유로 발생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으로는 모여 예배하는 것을 더욱 사모해야 하며 혹여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야 한다.

 

3. 공예배가 지극히 중요하지만 우리 신앙고백서가 가르치고 있듯이 공예배를 절대화시키는 위험에 빠져서도 안 된다. 종교개혁자들도 주일 성수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으나 전염병이 돌았을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한 피신을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4. 교회가 추가 감염을 예방하고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성도들을 일정기간 격리시키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레위기11-15장의 정결법은 부정하게 된 사람이 성막과 공동체를 더럽히지 못하도록 진영 밖으로 격리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들은 히브리서10:19-22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믿음과 회개를 통해 성도들이 제의적으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정결한 몸과 마음을 얻게 됨으로 근본적으로 성취되었다. 하지만 레위기15:31, 민수기5:2-3과 19:20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공동체를 전염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정결법 제정의 목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다.

 

5. 세상 통치자들을 위한 기도는 나라를 위한 성도의 의무이다(딤전2:1-2). 세상의 평안을 위해 성도들은 함께 기도하고 또 시민으로서 협력해야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교회는 평안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다할 기회를 얻고(렘29:7, 딤전2:2),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얻어서 복음 전도가 더욱 더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6.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주 부득이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공예배 외에 다른 형태의 예배를 시행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예배들이 공예배의 중요성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점에서 당회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정치 15장 4조 2항, 5조에 따르면 교회의 제반 예배를 주관하는 것을 당회의 직무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공예배 외의 특별한 형태의 예배들은 편의적이거나 자의적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되며, 당회의 결정과 감독에 따라 질서 있게 시행되도록 해야 한다. 성도들은 당회의 결정이 미흡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 순종해야 한다.

7. 이와 같은 전염병들은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섭리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코로나 발생을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또한 전염의 위험 때문에 예배 처소에 모이지 않은 성도를 성급하게 불신앙으로 정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마4:6). 어려운 시기일수록 교회는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아야 하고 이웃들에게 필요한 예방 물품들을 공급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성경은 곳곳에서 신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코로나의 위협 속에서도 신자들은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신자들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거나 걸리더라도 낫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오직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 개혁신앙의 선배들은 극한 환란과 고난 속에서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일한 위로는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이라고 고백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이 신앙이야말로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개혁신앙의 힘이요 유산이다.

(이 글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발표문을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전염병도 무시하는 이단

2020. 2. 23

신천지 집단감염이 국민보건에 치명적인 이유는 이들이 시한부(조건부) 종말론을 추종하는 집단이라는 데 있다. 신천지가 겉으로는 방역당국에 협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힘들다. 신천지를 지탱하는 핵심교리 자체가 반사회적인 시한부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정윤석 기독교포털뉴스 대표기자는 “신천지 신도들은 심지어 전염병도 무시한다”며 “2~3년 안에 자신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살게 된다는 망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신천지는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000이라는 숫자를 왜곡해 시한부 종말론을 만들어냈다.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 14만4000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은 14만4000명이 조만간 하나로 합쳐진다”는 게 신천지의 핵심 교리다.

 

신천지 총회 교적부에 등록된 자가 14만4000명이 되면 영계에서 대기하고 있던 14만4000명의 순교자들의 영(신천지는 ‘순영씨’라고도 부른다)과 육계의 14만4000명 신천지 신도들의 육체가 합일된다고 믿는다. 이렇게 되면 신천지 신도들은 영생불사의 몸이 된다고 한다.

 

정 대표기자는 “순교자의 영이 자신들의 몸에 들어와 합일을 이루면 몸이 신령하게 바뀐다고 믿기 때문에 몸이 아프고 힘들더라도 역사 완성을 향해 일한다”며 “그래서 병이 나거나 아프면 죄로 여기고 심지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도 산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신천지 신도는 이미 20만명을 넘었다. 전문가들은 2014년이나 2015년쯤 신도 수가 14만4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한 것처럼 대명천지가 열리지 않았기에 이를 수정한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교리를 만들어냈다. 알곡과 양에 들어가야 신인합일에 참여한다는 주장이다.

 

신천지 신도들 중에 무직자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종말이 가까우니 직장이나 학업은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알곡과 양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포교에 매달린다. 시한부 종말론 교리에 현혹돼 낙태나 이혼을 한 이들도 있다.

 

정 대표기자는 “알곡과 양을 가리기 위해 신천지는 2018년 ‘인 맞음 시험’을 치렀는데 90점이 넘어야 알곡과 양이 될 수 있다고 했다”면서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를 가리는 시험이었던 만큼 분위기가 살벌했고 신도들이 벌벌 떨며 문제를 풀었다”고 했다.

 

그는 “다만 아직도 알곡과 양에 해당하는 교인이 몇 명인지는 모른다”면서 “정해진 14만4000명이 차면 신인합일이 이뤄져야 하므로 이 수치를 조정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2020.2.20. ‘국민일보’에서 발췌 -

win-win 축복

2020. 2. 16

어떤 수도원에서 젊은이들이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서로 존경하며 인정하며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인기 있는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진리와 사랑은 서서히 사라지면서 갈등과 불신이 쌓여지고 서로 간에 원망과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이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들의 삶은 지옥같이 느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젊은이들이 하나 둘 수도원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마지막 다섯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수도원 문을 닫을 것인가, 아니면 좀 더 기다려 볼 것인가를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들은 평소에 존경하는 랍비를 찾아가 조언을 듣기로 했습니다. 묵묵히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랍비는 의외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이제 다섯 사람 남았지요? 여러분 다섯 사람 중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랍비의 말을 듣고 돌아 온 후부터 그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동료들의 모습 속에서 단점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이제는 동료들에게서 가능성과 장점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이라니? 그가 누구일까?’하고 서로의 가능성을 따져 보았습니다. ‘나는 분명 아니니 저 사람일까? 아니면 저 사람일까?’ 모두가 동일한 생각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수도원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존경과 사랑이 넘치게 된 것이죠.

 

그러자 그 소문은 사방으로 퍼지고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다시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로 수도원은 가득 차게 되고 생명력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나 교회가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로 만들어 지기 원한다면 서로를 높여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줄 때에 은혜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가 함께 높아져 모두가 이기는 이른바 윈윈(win-win)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높이며 칭찬해 봅시다. 칭찬은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할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칭찬과 높임을 통해 서로의 아픔도 씻고 서로의 비전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세우시고 이끄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자.

2020. 1. 19

  새해를 맞이하며 결심과 소망을 품고 시작한 시간들이 가쁜 호흡을 가다듬다보니 벌써 첫 번째 달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참으로 시간이 빠르다는 말로서는 표현이 어려울 정도의 속도감이 새삼 느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를 맞으면서 나름대로의 계획과 소원을 품고 시작한다. 불신자들 중에 금년에는 담배를 끊고 술을 끊으리라 결심하기도 하고,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은 새해에는 열심히 운동을 해서 건강관리를 잘 하고 다이어트도 하리라 결심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심대로 행동하는 것이 3일을 못 가는 것이 사실 보편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2020년이라는 한 해가 지금보다 더 지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다지는 심정으로 20여일 전의 마음을 되새겼으면 한다.

 

영국의 크리스천투데이는 ‘새해를 맞이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결단 3가지’라는 제목의 칼럼을 이야기 했다.

 

①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둔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119:9~11)

  모든 기독교인들은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먹고, 이를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죄로부터 멀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록 선택은 우리가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준다.

 

②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자기자신을 부인할 수 있도록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자기부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2명의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오직 1명의 주인만 섬길 수 있다. 그리스도를 섬기든지 우리 자신을 섬기게 된다. 나를 섬기게 되면 이기심, 탐욕,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이 그 뒤를 따르게 된다. 그러나 자기부인이 고통과 벌에 대한 욕심을 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를 위하여 우리의 이기적인 욕구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③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과의 친밀함을 늘려간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고자 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성 안에서 더욱 가까워질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된다. 더 나아가 그분이 우리 삶 속에 열매를 맺으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령이 맺는 열매는 그분과 우리의 친밀함의 척도가 된다.

 

  전 세계 크리스찬을 향한 이 간결하고도 중요한 기준이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는 매우 기억하기 쉽게 요약된 금년의 표어와 그 기본적인 내용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세우신 주님! 그 주님의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을 가슴으로 인식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금년 한 해가 되게 하소서.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

2019. 11. 24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훈훈한 사건이 있다. 경기도 김포시 소재 푸른솔 초등학교 학생 4명이 학교에서 배운 심폐소생술로 할머니의 생명을 구한 사건이다.

  지난 2019년 10월 28일 오후 3시쯤에 김하랑(13), 이승원(13) 학생은 하교를 하던 중, 길에 쓰러진 한 할머니를 발견하였다. 아이들은 즉시 119에 신고를 하고서, 구급대원이 올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하였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다가 이를 본 배소민(12), 조은채(12) 학생도 합류해서 재빨리 할머니에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고 한다. 이후 구급대원이 도착해 할머니를 병원으로 이송했으며 할머니는 무사히 의식을 회복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여러 차례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았고, 사고가 일어나기 4일 전에도 학교에서 심폐소생술(CPR)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속적인 심폐소생술 교육이 빛을 발한 것이다. 고사리 손으로 할머니의 생명을 살린 학생들의 소식을 듣고 학교는 그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고 말했다.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작은 영웅’들의 이번 선행이 다른 학생들과 지역 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기사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지 반성해 본다. 월리엄 부스 (William Booth)는 복음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으로 구세군을 창시한 사람이었다. 그가 영국의 여왕을 만나고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평생 잃어버린 자를 찾아 복음을 전하며 살리라.’ 

 

  그러자 여왕이 ‘부스’에게 물었다. “복음 전하는 일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부스’는 “그렇습니다. 물구나무를 서서 걷고, 발바닥으로 탬버린을 치면서라도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한 영혼이 돌아오기만 하면 사람들이 저를 보고 미쳤다고 해도 좋습니다. 조롱해도 좋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며 살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부스’는 복음 전도의 사명으로 살았다. 그에게는 영혼을 살리는 일이 삶의 최우선순위였다.

  우리도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우리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어느 분은 ‘전도는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을 얻어먹을 수 있는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두 거지에게 차이가 있다면 앞의 거지는 이미 빵을 얻었고, 그 빵을 제공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들은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가면 예외 없이 받는 질문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혼자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두 번째 심각한 질문을 받는다. “어떻게 혼자 올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추궁을 당하기 전에 이 땅에서 긴급하게 전도하여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하겠다. “주여! 긴급하게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십시오!”

 

  전도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영적 심폐소생술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의 유래

2019. 11. 3

  최근에 10월31일을 특별한 날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인들에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종교개혁일’로 기억되어야 할 이 특별한 날이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Halloween day’로 시끄럽게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아 졌다. 단순히 웃으며 지나기 보다는 Halloween day가 어디서부터 유래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살피면 가볍게 지나칠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Halloween day는 약 2,500년 전 아일랜드의 켈트(Celt)족이 사메인(Samhain)이라는 ‘죽음의 신’을 섬기면서 죽은 후 인간의 영혼은 ‘사메인’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이방종교에서 비롯되었다. 켈트족은 일 년에 한 번씩 그 사메인 신을 달래기 위하여 희생 제사를 드렸는데 그 날이 일 년의 끝 날인 10월 31일에 행해졌다. 그들은 밤에 검은 옷과 검은 두건을 쓰고 횃불을 밝히고 마을마다 다니며 강제로 처녀를 제물로 받아 인신제사를 드렸는데, 마을에 가서 “처녀를 바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다그치고 처녀를 바치지 아니하는 마을은 전체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아일랜드는 겨울과 여름이 대부분인데 10월 31일을 여름의 끝이고, 11월 1일은 겨울의 시작으로 여겼다. 그래서 여름이 끝나는 10월 31일에는 각종 유령과 마귀와 귀신들이 찾아와 산 사람 속에 들어가 다음 해에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켈트족은 그 유령과 귀신들을 속이기 위해서 집 안의 불을 끄고 사람이 안 사는 집처럼 꾸미고,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기도 하며, 또는 귀신들이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서 귀신보다 더 무서운 복장이나 가면을 쓰고, 밤에는 동네마다 장작더미를 쌓고 불을 피웠다고 한다.

  한편 4세기 경 로마제국이 세계를 장악하였을 때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로마 황제가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국교화 하면서 자신들의 종교 문화를 많이 유입시키게 되었는데, 켈트족의 사메인 숭배 풍습 악습이 퍼지는 것을 염려한 로마 카톨릭의 교황 그레고리 4세는 주후 840년에, 5월 13일로 지키던 ‘모든 성인의 날’(All Hallows Day)를 11월 1일로 바꾸고, 그 전날인 10월 31일을 그 전야제(All Hallows Evening)로 정하여 로마 카톨릭의 죽은 자 숭배일과 켈트족의 사메인 종교풍습과 연계시켰다. 그 전야제를 All Hallows E’en으로 표기하다가 후에는 Halloween으로 바뀌었다. 아일랜드와 스콧틀랜드 사람들이 미국에 이주하면서 그 풍습이 대대적으로 미주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현재 Halloween Day는 사탄숭배자나 악마주의자들의 최고 명절로 자리 잡았고, 매 할로윈 때마다 세계 각처에서 사탄 숭배자들이 옛날 켈트족들이 행하던 대로 동물제사를 드리며 심지어는 몰래 인신 제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할로윈 파티에서 사탄숭배자에 미혹되어 가입하는 자들도 많아진다. 하지만 이 날은 기독교와 정 반대되는 날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로마 카톨릭을 대항하여 카톨릭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95개 조항이 기록된 문서를 독일의 위텐베르크에 있는 성당의 문에 계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일으킨 날이다. 그 종교개혁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성경을 다시 평신도들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참 신앙의 길이 열리게 된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날에 많은 성도들 가정의 자녀들이 이방종교의 나쁜 풍습에 젖어 들고 있으니 통회하는 마음으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감사하면 어떻게 되나

2019. 10. 20

감사를 아는 것은 사람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성품이다. 이 감사는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또 다른 힘이 있다.

 

❶ 내 마음이 기쁘고 평안해 진다.

감사는 긍정적 행동 표현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생각을 품고, 긍정적인 말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평안해지게 된다. 그 사람의 마음은 얼굴로 드러난다. 성난 짐승의 얼굴을 보라. 일그러지고 사납다. 그리고 눈빛이 무섭다. 사람의 얼굴 역시 성난 사람은 무섭게 일그러지고 눈빛이 무섭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면 얼굴도 평안해지고 눈도 말도 순해진다.

 

❷ 분위기가 좋아진다.

어느 회사에 들어 가 보면, 현관 벽마다 벽보가 난잡하게 붙어 있다. ‘몰아내자 깨부수자 타도하자 물러가라 쟁취하자’등 붉은 글씨로 쓴 구호들이 있다. 살벌한 분위기다. 하지만 또 다른 회사에 들어가 보면, 단정한 글씨로 쓴 벽걸이가 여기 저기 삽화와 함께 걸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족자들이다. 두 회사 분위기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회사뿐이겠나? 가정 분위기, 교회 분위기도 다를 바 없다. 국가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나 장관이나 국회위원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는 나라가 왜 어려워지겠나? 왜 문제가 안 풀릴까? 전투적인 사회, 공격적인 분위기는 좋을 수가 없다.

 

❸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원망 불평은 마귀가 기뻐하는 제사지만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다. (시편50:14)을 보면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했고, (시50:23)을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다. 감사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 제사를 드리며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 만큼 감사로 드리는 제사가 중요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❹ 더 감사할 일이 일어난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은 영적 조건 반사인 것이다. 한숨 쉬는 것을 되풀이하면 한숨 쉬는 일이 익숙해진다. 포기를 자주하면 포기가 익숙해진다. 그러나 감사를 반복하면 감사가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감사할 일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엎드려 팔 굽혔다 폈다 하는 운동이 있다. 처음 하는 사람은 다섯 번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반복하다 보면 열 번 스무 번 반복이 가능해진다. 그만큼 반복이 중요한 것이다. 기도도 반복하다보면 생활화되고 감사도 찬송도 반복하다보면 생활화되는 것이다. 나쁜 일을 반복하다보면 익숙해진다. 반대로 좋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역시 익숙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일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감사하기를 힘써야 한다.

​소중한 한글

2019. 10. 13

  매년 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것은 한글이 반포된 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글은 조선 세종 28년 음력 9월 상한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표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라 9월 상순의 끝 날인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서기 1446년 10월 9일을 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한글날을 지킨 것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있던 1926년 조선어 연구회(지금의 한글 학회)가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 처음으로 ‘가갸날’이라 이름 해서 기념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한글은 현대 한국어의 표기에 쓰이는 문자로, 조선 제4대 국왕 세종과 왕자들이 직접 창제하여 1443년에 완성하고 1446년에 반포했다고 전해 오는 것입니다. 창제 당시 정식 이름은 ‘훈민정음’이었으나 조선 당시에는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주로 쓰는 글이라는 인식 때문에 주로 ‘언문(諺文)’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었죠. 구한말에 와서 나라의 글이란 뜻인 ‘국문’(國文)으로 잠시 부르다 이후 ‘한글’이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졌다고 알려 지고 있습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작명자에 대하여서는 꽤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주시경 선생이 1912년경에 저술한 ‘소리갈’이라는 책에서 처음 쓴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글의 글자 수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21세기 현재 한글은 기본자음 14자와 기본모음 10자로 구성된 음소문자이며, 현재 한글은 한국과 북한의 정식 국문이며, 중국 지린성의 옌볜이나 창바이(長白),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에서도 한국어를 공식 적으로 표기하는 문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글이 처음 발표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목적과 유래, 사용법, 원리가 담긴 일종의 한글 사용서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배포하며 더 쉽게 백성들이 한글을 익힐 수 있게 하려고 만들었지만 이후 한글을 낮추려는 일부 세도가와 왕들의 방해로 해례본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그러다 일제치하 시대에 이 해례본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소중한 문화재를 암암리에 사들여 일제로부터 보호했던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당장에 해례본의 소유자를 찾아갔습니다. 해례본을 가진 사람은 전형필 선생에게 천원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이 돈은 서울에 있는 커다란 기와집을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전형필 선생은 오히려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의 보물인데 고작 천원으로 되겠소? 내가 보기엔 최소 10배의 대접은 받아야 하니 만원을 드리겠소.” 판매가의 10배를 쾌척해 훈민정음을 구입한 전형필 선생은 이를 사진으로 찍어 학자들에게 보내 연구하게 했고 이런 노력 탓에 지금 훈민정음은 국보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까지 등록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한글은 너무나 소중한 자산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쉽고 익숙한 우리 글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축복 중에 단연 으뜸 되는 복일 것입니다. “주님, 성경을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영의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의인은 없습니다.

2019. 9. 29

  출구를 모르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고함을 지르며 시위하는 사람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자기주장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거짓과 위선이라며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아무런 잘못도 없고 나는 진실한데 왜 그러냐고 배를 내 미는 사람들, 그래도 이만하면 상대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아니냐며 힘을 보태는 사람들, 웬만해야 눈 감아 줄 수 있지 이건 아니지 않으냐며 얼굴 붉히는 사람들...... 백인백색의 주장이 온통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를 들어 봅시다. 조선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경기도 과천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과천 지역을 다스리던 현감이 능력을 인정받아 한양으로 전보 발령을 받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를 모시던 사람들은 현감을 기념하기 위한 송덕비를 세우려고 적을 비문을 현감에게 물었는데, 현감은 관심이 없으니 알아서 적으라고만 했습니다.

 

  다음 날 서울로 떠나던 현감은 송덕비가 남태령에 세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잠깐 들러 적힌 비문을 봤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今日送此盜’(금일송차도. 즉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

 

  그러나 현감은 오히려 이 비문을 보고 크게 웃고는 사람을 시켜 밑에 한 줄을 더 적게 했습니다. ‘明日來他賊’(명일래타적. 즉 내일은 다른 도둑이 올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새로 온 현감은 그 착취의 정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그래서 이 현감이 떠날 때 비문에는 다시 이런 글이 적혔습니다. ‘此盜來不盡’(차도래부진. 곧 도둑들만 계속해서 오는구나.)

 

  그리고 몇 년 뒤 어떤 마을 사람이 이 비문의 맨 마지막 줄을 적었습니다. ‘擧世皆爲盜’(거세개위도. 곧 이 세상엔 모두 도둑놈뿐이구나.)

 

  이 세상엔 의인은 없다는 것을 성경이 전해지기도 전에 이미 모두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지 않은 척, 나는 그 말에서 제외된 사람인 척 하는 모습들은 똑 같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아닌 예수님만 믿고 따라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사람의 한계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이 날마다 되새겨지는 날들입니다.

 

  지금 꼭 필요한 것은 수많은 소리들 가운데 또 하나의 소리가 아닌, 모든 소리를 덮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소리, 하나님 향하여 목청높이 부르짖어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뿐입니다. 지금은 이 나라와 이 시대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는 진정한 믿음의 애국자가 간절한 때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품입니다.

2019. 9. 8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한 가지 이상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미남, 미녀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톨스토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인물 중에는 외모가 뛰어나단 이유로 갑자기 의문사를 당해 사라지는 등장인물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이유가 외모 콤플렉스가 심각했던 톨스토이가 자신의 심리상태를 작품에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미남과 미녀들은 하나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그려졌다는 것입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긴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도 얼굴이 못 생긴 걸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요기 베라는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수군거리는 사람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못생겼습니다. 그런데 야구선수에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얼굴로 안타를 치는 선수를 본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잘못된 평가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시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그를 예배하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성도들은 우리 아버지처럼 외모가 아닌 내면의 모습, 겉모습 보다는 내면적 실력과 성품 특별히 그 믿음의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세상의 잘못된 기준들에 얽매여 콤플렉스가 생기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 나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것도 명품으로 만들어진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양성평등과 성평등은 다른 것이다.

2019. 7. 28

  작은 법안을 하나를 만들 때에도 낱말 하나, 토씨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자칫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단어나 문장의 의미가 뒤늦게 부정적 영향을 담은 독소 조항으로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스리슬쩍 단어 하나를 바꾸거나 착각하도록 만들어진 법문구가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윤리기준까지 훼손하는 경우가 있다.

  양성평등과 성평등은 다른 개념이다. 양성평등은 남여의 차별을 하지말자는 의미로 보면 되고, 성평등은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가 반영된 개념으로 매우 급진적이고 위험한 개념이다. 생물학적 성을 해체하고 자신이 자신의 성을 결정할 수 있게 하자는 뜻이다. 성평등은 자신이 때에 따라 남자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되기도 한다. 성평등이 되면 생물학적 남녀의 성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자연히 동성애라는 개념이 없어지게 되어 합법적인 개념이 되어 버린다.

   이 개념을 도입한 미국은 최근 군부대에서 자신을 여자라고 칭하는 남자들이 벌거벗고 여군들과 샤워를 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군 중에 남자 군인과 같은 시설을 사용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은 참고 받아들여야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영국의 유치원과 스웨덴에서도 ‘아빠(father)’와 ‘엄마(mother)’라는 단어의 사용이 금지되고, 스위스에서는 공식서류에 ‘parent1’, ‘parent2’를 사용한다는 소식이다. 생물학적 남녀의 구분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성적 중립(gender neutral)적 표현들로 대체되고 있다. 비슷한 뉴스가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도 들려온다. 생물학적 성을 해체하자는 성평등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결과다. 이런 젠더이념은 급진적인 네오 막시즘과 궤를 같이하는 개념이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젠더주류화(gender mainstreaming)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젠더 주류화’라는 말을 잘 알지 못한다. 그 결과 최근 몇 년 동안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 정치인들과 미디어의 일부가 젠더 주류화의 재교육 프레임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인류를 재교육시켜 남녀의 경계를 허물고 가정을 해체하는 것이 젠더주류화의 목적이다. 그 실천방안으로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헌법이나 법률, 자치단체 조례에 성평등이라는 문구를 집어넣는 작업이다. 이런 위험성을 모르고 입법위원들이 양성평등과 성평등을 혼동해서 사용한 것이라면 위험천만한 일이고, 알면서도 은근 슬쩍 집어넣은 행위라면 가정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위험한 사상을 집어넣은 것으로 국민에 대한 암묵적 기망행위이다.

  의학적으로도 생물학적 남녀의 구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남녀의 정상범위가 다르고 생의 주기에 따른 몸의 변화도 서로 다르고 호르몬의 변화도 남녀가 다르다. 남녀가 차별 없는 교육의 기회, 취업의 기회, 의사표현의 기회, 가사와 양육의 분담을 갖자는 양성평등의 개념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발전시켜야 할 개념이다. 하지만 생물학적 성을 해체하고 가정을 해체하는 급진적인 성평등의 개념은 양성평등과 분명히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의사평론가>

 

※ 이비인후과 원장 이명진(의사평로가)의 글. ‘의학신문’에서 인용

불평을 다스리자.

2019. 7. 21

장마가 지속되면서 무더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당분간은 조금씩 더 더워지면서 생활 속에서 불쾌지수가 점점 더 올라 갈 것으로 보인다. 조그만 일에도 짜증이 나고 불평을 털어 놓기 쉬운 계절이다. 돌아서서 생각하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닌데,,,’ 후회가 되면서도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불평과 울분으로 나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기 쉬운 시간들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영적 성숙을 이루어가면서 이 영적 성숙이 육적인 생활에까지 좋은 영향을 기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날들이다.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불평과 불만을 멈춰야 하는 이유에 대하서 크게 3가지 이유를 주장한다.

 

1) 불평은 하면 할수록 불평을 더 많이 하고 잘하는 뇌가 되어 간다.

한 가지 일을 반복하다보면 뇌의 시냅스가 발달해서 점점 숙련이 되는데 이 원리는 감정이나 생각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2) 안 좋은 감정은 주변으로 전파된다.

매사추세츠의 프래밍험이라는 마을에서 60여 년간 진행되고 있는 연구에 따르면 우울증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은 빠르게 마을 전체로 번져갔다. 그러나 긍정적인 감정은 쉽게 전달되지 않았다.

 

3) 자신의 건강을 해친다.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을 자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에 비해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2배 이상 높았다.

 

화를 내는 것이 아무리 안 좋다 하더라도 아예 내지 않을 수는 없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처럼 화를 잘 다스리고 제어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내는 것이 좋지 않은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분노의 감정은 잘 다스리고 해소해야만 나에게도 도움이 되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나 나라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나 이 원리는 동일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 타당하고 바르다 할지라도 화를 먼저 내는 사람이 결국은 불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모든 불평과 불만을 그 자리에서 표현하지 안ㄹ도록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때가 지금이다. 필요 이상의 화를 내지 않고 분을 잘 제어할 수 있는 마음을 위해 기도하자.

 

주님, 감정을 다스리는 지혜와 인내를 허락하소서! 나도 모르게 불쑥 솟아나는 불평과 짜증을 감사와 재치 있는 유머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37:8)

감사(感謝)를 아는 사람

2019. 7. 14

  감사(感謝)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일까? 한자로 보면, 감(感)자는 다할 함(咸)에 마음 심(心)을 합한 글자로 ‘마음을 다 한다’는 뜻이며, 사(謝)자는 말씀 언(言)에 쏠 사(射)를 합한 글자로 ‘궁수가 활을 쏘듯 마음을 다해 말씀을 드린다.’는 뜻이다. 이 글자를 그대로 연결해서 그 의미를 새겨 보니 감사(感謝)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독일 정치가 중에 마티 바덴(Marty Baden)은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 값싼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보니 구두가 없어진 것이다. 밤새 도둑을 맞은 것이다. 그는 화가 잔뜩 나서 “누가 내 신발을 훔쳐 갔어?”하고 욕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 가게 하시다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때 친구가 헌 신발을 빌려주며 주일이니 함께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였다. 제의를 거절할 수 없어 마티는 마지못해 교회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 중에서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기도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마티 바덴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고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발을 신을 수가 없구나. 그런데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그저 신발만을 잃어버렸을 뿐 아닌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데도 이렇게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으니...’하고 회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그 때부터 마티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후 마티는 언제나 감사의 생활을 했다. 항상 감사할 조건을 찾았다. 마침내 국민의 존경을 받는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를 위해 크게 일하는 정치가가 되었다.

 

  흑인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에 올랐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라는 분이 있다. 그는 백인 정부에 의해 26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가 출옥할 때 사람들은 아주 허약한 상태로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7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걸어 나왔다. 5년만 감옥살이를 해도 건강을 잃고 나오는데, 어떻게 26년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도 그렇게 건강한 상태로 출옥할 수 있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그때 그는 ‘나는 감옥에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대통령까지 당선되었다. 감사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물론 만델라는 26년 동안 감옥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좁은 독방 안에서 규칙적으로 팔굽혀 펴기를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과 함께 건강을 유지시켜 준 큰 이유는 무엇보다 감사를 빼놓을 수 없다. 감사하는 사람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 감사하는 사람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보다 훨씬 장수한다. 감사하는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 이유는 감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감사에 기적의 씨앗이 있다. 넘치는 감사로 기도하고 찬양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기적을 이루어주신다.

헌신의 사람 Studd

2019. 7. 7

  찰리 스터드(C.T. Studd)는 중국과 아프리카 선교에 일생을 바친 선교사였다. 무디 부흥집회에 참석했다가 선교사로 헌신하기를 결단하였다. 그런데 사실 찰리 스터드(C.T. Studd)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크리켓 선수 중 한 명으로 주목받으며 캠브리지 대학 팀의 최고의 선수이자 주장이었다. 그런 찰리의 갑작스런 선교사로의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 안에서 함께 가까이 지내며 믿음의 끈을 이어 오던 친구들 6명과 같이 이른바 ‘캠브리지 7인’은 중국 오지선교회(OMF)의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당시 신문은 그들의 헌신을 가리켜 기록하기를 ‘선교 역사상 이렇게 재능이 뛰어난 7명의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선교사로 헌신된 예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찰리 스터드는 중국에서 10년 동안 선교하는 도중에 개인적으로 큰 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포기하고 평범한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재정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 ‘식인종은 선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사람이 아닌 분류로 인식될 정도로 특별한 종족인 식인종도 선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앙아프리카 수십만 명의 부족에게 복음을 증거할 선교사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큰 충격과 도전을 받고서 중국선교를 정리하고 아프리카에 가기로 결단하였다. 그때 그는 나이 오십이 훨씬 넘었고, 질병도 가지고 있었기에 아내는 극구 만류했으나 그의 걸음은 아프리카로 향했다. 동역자이자 사위였던 노만 그럽 선교사는 그에 대해 말하기를 “그분은 휴식하는 일이 없었으며 한눈파는 일도, 휴일도, 취미생활도 없었습니다. 유럽식의 풍요로운 생활을 피하고 아프리카인들과 똑같이 살도록 사역자들에게 강요하였기에 종종 동역자들과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찰리 스터드는 ‘아프리카의 심장선교회’(The Heart of Africa Mission)라는 선교단체를 결성하고, 후에 이를 ‘국제선교회’(WEC)로 명칭을 바꾸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가족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미친 듯이 뛰었던 스터드의 헌신으로 ‘국제선교회’는 한국을 비롯한 50개국이 참여하고 2천명의 선교사가 80여국에서 선교에 열중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헌신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찰리 스터드,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시는가? 지금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며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오늘 내가 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일일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차이

2019. 6. 30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아주 작다. ‘행복하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한자 ‘행’(幸)자에 가로 막대기 하나가 없어지면 ‘신’(辛)자가 된다. 이 글자의 유래는 중국에서 노예의 이마에 문신을 새길 때 아프다는 뜻의 한자를 만들었는데, 그 글자가 ‘매울 신(辛)’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 글자는 ‘고생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세상 사람들은 명예, 권력, 지식, 돈, 향락, 사치, 술로 행복을 채우려 하지만 결국 허무와 슬픔뿐이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한 가지가 모자라서다. 이 모자란 것 하나만 채우면 행복해 질 수 있다. 우리가 채워야 할 한 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곧 바로 내 마음속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마음에 예수를 모시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평안이 넘치게 되고 소망이 있는 삶이 된다.


  7080 시대에 유명한 가수 윤항기는 ‘해변으로 가요’라는 히트곡을 낸 한국 최초 그룹사운드 ‘키보이스’의 리더로 활동하였었다. 솔로로 활동할 때 그는 ‘나는 어떡하라고, 장밋빛 스카프, 가는 세월, 너무 합니다’ 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다가 80년 아시안 게임을 끝으로 방송에서 멀어지면서 연예계를 떠났던 사람이다. 그리고 90년에 목사가 되어 나타났다. 가수 윤항기가 목사가 되자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는 “사실은 제가 70년에 큰 병을 앓았어요. 공연 중 과로로 쓰러졌는데 폐결핵 말기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을 때였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1년 이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가서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남은 인생을 하나님 위해 바치리라고 다짐했어요. 회생 불가능한 저는 이 과정을 통해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고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79년 서울 국제가요제에서 동생과 함께 불렀던 '여러분' 으로 대상을 받았는데, 그 때가 제 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80년대에 ‘나는 행복합니다’를 발표했는데, 새 생명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 얼마나 행복한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래입니다.”라고 간증하였다. 그는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정말 행복합니다. 기다리던 오늘 그 날이 왔어요. 즐거운 날이예요. 움츠렸던 어깨 답답한 가슴 활짝 펴 봐요. 가벼운 옷차림에 다정한 벗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들과 산을 뛰며 노래를 불러요. 우리 모두 다함께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정말 행복합니다.’라고 노랫말로 예수 안에 있는 자기 모습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간단히 테스트해 볼 수 있다. 다음  10가지 항목 중에 몇 개가 해당되는지 살펴  보면 된다. ①사랑해 ②미안해 ③고마워 ④괜찮아 ⑤힘내 ⑥기도해 줄게 ⑦너는 할 수 있어 ⑧잘 될 거야 ⑨그럴 수도 있지 ⑩너를 만난 것이 행복해~ 이런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은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이다.

  또한 다음 10가지 항목 중에 자주 쓰는 말은 몇 개나 되는지 세어 보면 된다. ①죽겠어 ②네 탓이야 ③보기 싫어 ④될 대로 되라지 ⑤신경질 나 ⑥되는 게 없어 ⑦안보면 그만이지 ⑧복도 지지리 없어 ⑨내 주변에는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어 ⑩내가 뭘 잘못했어?

평소에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행복지수가 낮은 사람이다. 스스로 한 번 진단해 보시길......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직분

2019. 6. 23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I'd Rather Have Jesus)의 작곡자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젊은 시절 전도유망한 음악가였다. 23세가 되던 해, 방송국 오디션에 합격하고 전속 가수로 채용이 되었다. 그때 조지가 조건을 제시하였다. “라디오 방송에서 찬송을 부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합의된 노래만 부르는 규정으로 찬송은 부를 수 없다”고 통보가 왔다. 

 

그는 고민을 하다가 어머니와 의논하였다. 어머니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조지 역시 기도할 뿐이었다. 며칠 후,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께서 조지가 읽기를 희망하며 올려놓은 친구 밀러 부인의 시였다. 시를 읽던 조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압도되었다. 마음에 감동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며 피아노 앞에 앉아 선율을 짓고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바로 “주 예수보다 더”(I'd Rather Have Jesus)라는 찬송이다.

 

그 감동으로 조지는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것 곧 ‘찬송 부르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방송국의 계약을 거절하였다. 얼마 후 작은 방송국이지만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조건으로 취직하였다. 그 방송국에서 젊은 전도자를 만나게 된다. 그의 전도 집회에서 찬송을 불렀다. 그 전도자는 20세기 최고의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었다.

 

조지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전 세계를 다니며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한 가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2011년, 102세의 나이로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받는 자리에서 수천 명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 조지 베버리 쉐아는 그 자리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길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뜨거운 박수갈채도 예수님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탈무드(Talmud)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 아버지가 있었다. 멀리 있는 아들을 두고 아버지가 죽게 되었다. 아들이 급히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는 유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하다가 유서를 이렇게 작성하였다. “모든 재산을 종에게 남긴다. 아들에게는 아무 것이나 하나만 원하는 것을 준다.”

 

유언장을 본 종은 급히 아들에게 연락하여 오게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유언장을 보고 실망했다. 유언장을 들고 랍비를 찾아갔다. 유언장을 보던 랍비는 지혜로운 아버지의 생각을 알았다. 아버지는 종이 유산을 탐내 아들을 죽일까 봐 유산을 종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이윽고 랍비는 “너는 종만 너의 것으로 하면 된다. 종의 소유는 다 주인의 소유이니까.”라고 말하였다.

 

모든 것이 다 필요 없었다. 하나만 가지면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보다 창조하신 하나님이 더 위대하다. 하나님 한 분만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게 된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이다.

 

- 인용한 글 -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직분

2019. 6. 16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대통령은 정치가로는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인격의 무게와 삶의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귀한 인물이 되었다. 어느 기자가 지미 카터의 퇴임 후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인상 깊은 기사를 썼다. ‘카터는 백악관이 목표가 아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카터 대통령에게 백악관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카터의 실제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다. 다만 섬김의 과정에 백악관이라는 자리가 주어졌을 따름이다. 따라서 카터는 백악관에서 나왔어도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을 섬겼다. 퇴임 후 조지아의 시골 교회로 돌아와 전처럼 교회학교 교사를 하였다. 한 달에 한 번씩 교회 청소를 부인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카터가 어떻게 청소하나, 어떻게 교사가 되어 가르치나 그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교인보다 구경꾼들이 더 많을 때가 있었다.

 

세계의 분쟁이 일어나면 카터를 조정자로 보내달라는 요구가 높다. 왜냐하면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관은 자리가 아니다. 소유가 아니다. 그 존재가 인격의 무게로 다가올 때 감동이 되는 것이다. 존재에 가치를 두고 충성해야 한다. 훗날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구나” 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직분이 있는 자들만 봉사하는 곳이 아니다. 똑똑한 사람만 봉사하는 곳도 더더욱 아니다. 모두가 봉사하는 곳이다. 우리가 일을 잘하지 못해도 열심히 할 때 칭찬받게 된다. 실패를 해도 최선을 다했다면 칭찬을 받게 된다.

 

주께서 종말의 때를 감추신 것은 우리를 위한 은혜다. 만일 그 때를 안다면 모든 일을 내팽개쳐 두고 오직 종말의 때에 집착함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종말의 때를 알지 못하기에 시간을 귀히 여기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2019. 5. 19

  링컨(Abraham Lincoln)이 9살 되었을 때 어머니 낸시(Nancy)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임종 시에 링컨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항상 성경을 읽고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라.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나의 부탁이다.”하고 눈을 감았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배운 영향이 일생동안 링컨을 지배하였다. 정규 학교 교육이라고는 1년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빈곤의 최저 밑바닥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은 오로지 그의 어머니가 가르쳐 준 성경교육의 힘이었다. 링컨은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오늘의 내가 나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성경을 배운 덕택이라”고 하였다.

타임지에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목사와 아들 프랭크린 그래함(Frankline Graham)에 대한 기사가 커버스토리로 다뤄진 적이 있었다. 제목은 ‘돌아온 탕자(The Prodigal Son)’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탁월한 하나님의 종이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큰아들은 열두 살 때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 곁길로 탈선하였다. 독한 위스키 마시고, 총 쏘는 것 좋아하고, 오토바이 폭주에 빠졌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부모님을 절망가운데 빠뜨리는 행동들만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의 호텔에 앉아 생각하길 ‘내가 이렇게 살수는 없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뛰쳐나왔지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그리고 호텔 방에 있던 기드온 협회의 성경을 펼쳤는데 로마서 8장 1절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오면서 ‘아,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용서하시는 구나’하는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지금은 아버지 빌리 그래함의 후계자가 되어 전 세계를 순회하는 복음 전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특별히 그가 탕자의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많은 청소년들이 주님께로 돌아온다고 한다. 기도하는 부모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구세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는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부인이 있다. 부스 여사는 8명의 자녀들을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게 했을 뿐더러, 부친의 전도사업에 도움을 주는 인물들로 양육했다. 그녀에게 양육의 방법을 물었더니 ‘언제나 악마보다 내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을 배우기 전에 좋은 습관을 먼저 가르칩니다. 악마가 나쁜 생각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생각을 가르칩니다. 악마가 나쁜 지혜를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악마가 사단의 거짓과 위선과 악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잘못된 가치관에 물들게 되면 바꾸기 어렵다. 미리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에 나타나는 바르지 않으며, 좋지 않은 일의 뿌리는 사랑의 결핍이다. 사랑 없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사랑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도 죄의 문제를 사랑으로 푸셨다. 십자가로 푸신 것이다. 풍성한 삶을 원하신다면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절망은 내가 만든 올무입니다.

2019. 4. 7

한 청년이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신학대학의 과정을 마친 후 선교사 훈련을 받고 찬근차근 과정을 밟으면서 준비했습니다. 파송을 위한 마지막 단계까지 모두 끝낸 청년은 기도하며 준비한 대로 잘 진행되어 너무 기뻐하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상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 옷과 구두를 준비하려고 시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시장으로 가는 길에 불의의 자동차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청년은 큰 부상을 입어 부득이하게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치료를 마친 이후에 의족을 하게 된 청년은 크게 낙망하여 “하나님! 제가 선교사로 나간다는데 어찌하여 다리를 자르시는 겁니까?”라고 울부짖으며 괴로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동안을 그렇게 낙심해 있던 그는, 어느 날 아프리카로 갈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설마 나 같은 사람도 받아주겠는가?’하는 마음으로 신청을 했고, 정말 의외로 모든 조건들이 맞게 되어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전력하여 선교 활동을 하던 그는 식인종들을 만나게 되어 죽음의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식인종들이 빙 둘러싸고는 이 백인을 잡아먹겠다며 축제를 벌입니다. 그 때에 이 성령께서 순간적으로 이 청년 선교사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는 의족인 자기의 한쪽 다리를 뚝 떼어서 저들에게 던졌습니다. 영문을 알지 못하고 고무다리를 받아 든 식인종들은 이것을 먹으려고 입에 넣어보고서는 기겁을 했습니다.

 

“이 자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하면서 이 선교사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시작으로 그들을 쉽게 전도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는 그때에 가서야 자기의 다리 하나가 잘린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어리석은 원망을 많이 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내가 생각하고 기다리는 그 환경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났기 때문은 아닌가요?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고 또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절망이나 낙심은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이 그 얄팍한 부분적인 지식으로 스스로 판단하며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올무일 뿐입니다. 발밑에서 몰아치는 파도를 보는 자는 빠질 수밖에 없지만 눈을 들어 주를 보는 자는 그 파도를 딛고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을 이기는 매우 힘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헌신

2019. 3. 31

1955년 가을, 미국 오리건 주 유게네 라는, 조그만 농촌의 마을회관에서는, 한편의 홍보영화가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그 영화는 6.25 한국전쟁에서 생겨난, 고아들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전쟁 중에, 미군병사들과 한국 여인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 버려진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사랑의 손길을 찾는다는 간절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본, 한 가난한 농부 부부의 뇌리 속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한국전쟁 고아들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골의 가난한 농부에 불과한데 어떻게 저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라며 그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날 보았던 한국전쟁 고아들에 대한 장면이 너무나 선명하게 클로즈업 되어 오는 것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두 부부는 손을 잡고 기도하며 의논한 결과 농장 중 일부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1955년 10월 12일에 직접 한국으로 오게 되었고, 12명의 혼혈 고아들을 양자로 입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실이 지역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그들을 돕겠다는 연락이 각처에서 쇄도했고, 자신들도 고아를 양자로 들이겠다는 가정이 하나둘씩 늘어났습니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그 부부는 16,000여 명의 한국 전쟁고아를 미국 가정으로 입양시켜 주는 사역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의 이름이 바로 홀트 아동복지회의 설립자인 ‘헤리 홀트’입니다.

 

이렇듯 가난한 시골농부의 뜨거운 사랑과 헌신이 전쟁직후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갈 곳 없어 헤매던 고아들을 따뜻한 가정의 품으로 인도해주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온전한 헌신과 그에 동반되는 사역은 성숙한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헌신의 사역으로 표출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분들이 많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일하시는 하나님

2019. 3. 24

모든 피조 세계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 속에 시간이 연속되는 중에도 하나님은 조금도 쉬지 않으시고 일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형편과 상황을 아시고, 아실뿐만이 아니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역사를 손수 만드시고 진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현재의 역사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들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손길이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리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요셉과 함께 일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랍비가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나귀에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아무리 가도 집이 보이지 않자, 길옆에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을 천막에 묶었습니다. 그 랍비가 닭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아침을 알려 주는 시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죠.

 

랍비가 천막 속에서 등불을 켜고 성경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등잔대가 넘어지고 불이 꺼졌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성경을 덮고 기도한 후에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맹수들의 공격을 받아 나귀와 닭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찢겨진 천막을 챙기고는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캄캄한 밤이라 몰랐었는데 그가 잔 곳은 마을과 아주 가까웠고, 그곳에 가 보니 온 동네가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어젯밤 강도떼가 마을에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아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랍비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만일 그의 거처에 등불이 켜져 있었든지, 닭이나 나귀가 살아서 소리라도 냈다면 틀림없이 그도 죽었을 텐데, 이 세 가지를 미리 잃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내가 깨닫지 못할 뿐이나 하나님은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고 나가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2019. 3. 17

특정한 정치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어느 계열의 사람 혹은 어느 동 사람이라는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본다. 사상적으로 혹은 특정 세력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단 한 번 그 계열의 사람으로 분류가 되고나면 웬만해서는 그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공통의 생각이나 성향을 그대로 지니게 된다.

 

나는 누구의 사람인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어떻게 평가를 하고 분류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가끔은 끔직한 두려움마저 느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류되어지고 평가 되어 지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나는 그 쪽의 사람들이 가진 특성이나 성향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반증이 되기에 별 도리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분류 해 주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나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는 그럴만한 자격도 조건도 갖추지 못한 것을 잘 알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분류되고 싶다. 아니 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평가 받고 싶다. 간절히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여지지 않는 것이 때로 안타깝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난 그렇게 보이며 그렇게 살고 싶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나를 그려본다.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렇게 순종하고 싶다. 나 자신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모습이 나의 모습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연상하며 ‘저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가?’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최고의 인생일 것이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성막 위에 머물면서 광야의 두려움 속에 싸인 백성을 인도하시는 장면을 바라본다. 동일한 구름과 불기둥이 사람들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가는 내 위에서 나를 감싸며 인도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내 모습 속에 나타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 볼 수 있기를 원한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편에 선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위에 있고 밤에는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보았더라.” (출40:38)

 

지난해에 실었던 글이지만 오늘 말씀 주제와 맞기에 다시 한 번 올려드립니다.

​행복을 심는 사람

2019. 3. 3

지독히도 불행하게 살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던 이 여인이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다 판다고 하는 가게를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인은 너무 좋아서 최고의 행복을 사서 다시는 불행해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습니다. “마음의 사랑과 평화, 지혜와 행복, 그리고 온갖 걱정을 털어버리게 해주는 행복을 주세요.” 반갑게 말하는 여인의 말을 들은 주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부인,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은데 우리 가게는 열매를 파는 게 아니라 씨앗만 팔아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문제는 그 열매만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열매는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땀 흘리고 가꾸어서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행복의 열매만 얻으려고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사랑의 씨앗을 잘 뿌린 사람은 사랑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희생과 헌신의 씨앗을 잘 뿌린 사람이라야 아름다운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겸손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당연히 영광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심은 대로 거둘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두어들이는 열매는 이미 씨앗을 뿌릴 때에 정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정치를 하는 분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난제 중 하나가 부동산 가격을 안정되게 하는 것이라고 이구동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정책보다 우선 되어야 할 것이 바로 심지 않은데서 거두려고 하는 잘못된 의식을 고쳐 잡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동산에 투자해서 쉽게 열매를 따 먹으려고 하는 사회적인 심리를 먼저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순간에 투기라는 말은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봄기운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을 바라보며 조용히 씨앗을 뿌리는 계절인 봄이 가르쳐주는 자연의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봄과 함께 새로운 학기, 새로운 학교, 또한 새로운 정부까지 시작하는 희망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순간들을 맞으면서 ‘씨 뿌리는 자가 열매를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슴에 담고서, 행복을 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조상 제사를 반대하는 이유

2019. 2. 3

어떤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면 죽은 조상들이 와서 차려 놓은 음식을 먹고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이 세상에 다시는 올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육신이 죽으면 즉시 하늘나라 아니면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눅16:19-31). 그러므로 죽은 조상은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제사를 지낼 때 온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귀들입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전10:20)

 

이 말씀에 따르면 제사를 지낼 때 조상들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죄짓게 만들고 병을 주며 살인하게 만들고 도둑질하게 만들고 음란하게 만드는 마귀가 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를 자주 지내는 사람들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그런 생각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그토록 효도의 종교라면, 왜 교회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는가? 어불성설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효도하라고 하면서 효도의 한 방법인 조상제사를 금하는 것은 어불성설 같이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 기독교가 이 일로 인해 불신자 분들에게 많은 오해와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부모도, 조상도 모르는 불효자들이다”거나 “기독교는 좋은데 제사를 안 지내서 나쁘다”거나 하는 비판과 때로는 비방에 가까운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효에 대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며, 기독교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으며(신5:16) 나아가 이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 ‘땅에서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릴 것이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조상 제사에 대한 철학적 의미로는 과거지향적인 순환론적 사고입니다. 역사적으로 원래 조상숭배는 없었고, 훌륭한 왕에게만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평민도 자신과 자신의 조상을 자랑하기 위해 제사 드릴 수 있도록 본질이 왜곡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는 계급 차별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과거 선비만이 드릴 수 있는 것이었으며 일반 평민과 천민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왕권에 의해서 ‘제사를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는 식으로 교육적으로 강요된 것입니다.

 

이것이 점차 후대로 전해지면서 추가된 내용으로는, 제사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잘 모시면 자손이 복을 받고, 재액이나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죽은 자(조상을 귀신으로 봄)를 대상으로 한 신앙이요(신앙적인 속성),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 제1계명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와 제 2계명 “어떤 모양으로도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성도

2019. 1. 20

군인이 되어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자신의 관등성명을 대는 것입니다. 누구든 나를 부른다고 생각되면 힘차게 어느 부대 소속의 어떤 계급인지를 대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건 군대라는 조직 사회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알고 사는 것은 삶의 방법이나 목적 이전에 가장 기본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혹은 스스로 알지도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에 이미 한국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 또한 한국인으로서의 긍지 혹은 민족애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육신 뿐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라면 이미 그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독교인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과 문화가 익숙해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자신의 이러한 소속을 정확하게 밝히기를 꺼려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밝히기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의 소속 자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할 정도입니다.

 

만약 어느 성도가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저는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며 사는 것은 싫습니다. 세상 속에서 드러나지 않고 묻혀서 살기 원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전 축구 선수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팀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저 혼자 조용히 공을 차는 최고의 축구 선수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기로 결심하고 약속한 성도 여러분, 소속이 분명한 자는 자신을 드러내는데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가 있어야만 합니다.

 

성도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람다운 모습과 행동을 나타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축복의 부메랑을 던집시다.

2019. 1. 13

옛말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부끄럽고 가슴이 찔리는 말입니다. 이건 결코 성경적인 마음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마음으로 축복하며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꼬집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의 특징 중에 하나가 모든 일에 열심은 있는데, 그것이 지나쳐서 너무 경쟁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격려하고 힘을 주며 내가 배우려고 하기 보다는 그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으로 이기려고 하는 모습들을 어렵잖게 보게 됩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라고 하는 ‘아리랑’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심각한 정서를 보게 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네.’ 이것은 저주를 하는 내용입니다. 나를 떠났다고 저주하는 것은 옳은 자세가 결코 아닙니다. 물론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연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진정한 사랑은 비록 나를 떠났다 할지라도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어느 선비가 길을 가다가 검정 소와 누렁 소 두 마리를 함께 앞세우고 밭을 가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재미삼아서 농부에게 다가가서는 “어느 녀석이 더 일을 잘하는 놈입니까?”라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농부는 질문한 선비를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는 귀속 말로 조심스럽게 대답하기를 “힘이 세기로는 검정 소요,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누렁 소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선비는 신기한 듯이 “아니 뭘, 그걸 이렇게 비밀이나 되듯 속삭이는 거요?”라고 하니 농부는 “칭찬도 여러 번 하면 욕이 되거늘 하물며 자기를 탓하는 말을 듣는데서 어찌 합니까?”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말 못하는 미물도 소중히 여기는 그 농부의 모습을 보고서 이 선비는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일평생 남을 헐뜯는 말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한 평생 남 잘되기만 바라며 축복하는 말만 하리라.’ 그가 조선 초기에 4대에 걸친 왕을 섬기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특히 세종 때에는 18년간 영의정을 지내며 청렴하고 결백한 조선 최고의 정치인이라고 추앙 받는 ‘황 희’ 정승이 되셨습니다.

남을 축복할 줄 못하는 사람은 결코 큰일을 하지 못합니다. 왜 축복하지를 못할까요? 한 마디로 그 이유는 그릇이 작기 때문입니다. 넓은 바다는 폭우가 쏟아져도 문제없지만 조그만 접시에는 한 방울의 물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넉넉한 마음의 그릇을 가진 멋진 반대자들이 우리 정치계와, 학계와, 온 사회에 가득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분명 이 나라는 멋진 나라가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역시 생각은 달라도, 기준은 달라도, 넉넉한 그릇을 가진 분들이 많을 때, 그게 곧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우리 축복의 부메랑을 힘껏 던져 봅시다. 우리가 던진 축복은 부메랑처럼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 올 것입니다.

책임질 줄 아는 사람

 

2018. 12. 9

우리가 이 땅에서 생활하는 중에 좋은 일도 만나고 어려운 일에 처하게 됩니다. 그 중에 특별히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그 일에 대응하는 모습도 갖가지 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처신하는 모습을 보면 인생을 값지게 살아가는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음을 알게 될 것 입니다.어떤 분이 일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짐승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먼저 ‘쥐’형이 있습니다. 이 유형은 문제가 생기면 순식간에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체념 형’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일에 책임을 지기보다는 무조건 피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토끼 형’입니다. 겁부터 먹는 이 유형이기 때문에 ‘공포 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사실이나 진의를 파악도 하기 전에 먼저 떨고 겁을 내면서 자신은 위축되고 호들갑스러운 소문만 내면서 문제의 해결은커녕 오히려 확대를 시키면서 결국은 해결을 못하고 마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은 ‘원숭이 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안절부절 형’입니다. 원숭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소란을 피우는 것처럼, 사람들 중에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갈팡질팡 중심을 잃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리는 요란하지만, 어떤 결과는 없는 사람입니다.

 

끝으로 ‘멧돼지 ’형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도저 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소신이 뚜렷하고 분명하여서 우직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책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은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권리 주장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책임 감당에는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 많은 곳은 언제나 시끄럽고 분주하지만 늘 원망과 불평만 가득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용히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성실함과 따뜻한 열정이 넘쳐 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그 곳의 분위기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모습입니다. 묵묵히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헤매기 전에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된다면 아마도 지금 여러분이 속한 그곳은 아마도 자신의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도전하는 사람

 

2018. 12. 2

어떤 물건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사람과 다 만들어진 물건을 사영하면서 그 물건을 판단하거나 혹은 비판하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창조적인 아이디어의 유무만은 아닙니다. 필요성을 느끼는 마음과 그 필요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전 정신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어떤 필요성을 느낄 때에도 단순히 그 생각을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혹은 한두 번의 시행 정도로 자신의 의지를 다 표현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하여 미련을 갖거나ㅣ 혹은 잊어 버리는 것으로 지나쳐 버리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성취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소매상협회에서 세일즈맨의 거래 실적과 집념의 상관관계를 연구 공개했습니다. 물건을 판매할 때 세일즈맨 중 48%는 단 한번 권유하고 포기한다고 합니다. 25%의 세일즈맨은 두 번 권유하고 포기한답니다. 그리고 15%의 세일즈맨은 세 번 권유하고 포기하는데, 세일즈맨 중 오직 12%만이 네 번 이상 권유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네 번 이상 권유하는 12%의 세일즈맨이 전체 판매량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88%의 세일즈맨이 판매한 상품은 고작 20%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이루는 사람은 그 의지와 끈기에서부터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절함 혹은 분명한 목표를 향한 집념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전도’의 세일즈맨입니다. 당신은 한 사람에게 적어도 열 번 이상 전도의 메시지를 전했었는지요? 아니면 한 번의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요. 한 사람을 붙들고 열 번 이상을 진지한 마음과 믿음의 자세로 전도해 보십시오. 상대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감사해서라도 교회라는 곳을 한번쯤 찾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준비된 영혼을 만나는 것만큼 당신의 끈질긴 도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끈기의 사람들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로 제자들인 것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손해와 희생

2018. 11. 25

요즈음 사람들이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문제를 살펴보면 "손해 보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업하는 사람의 경우는 손해가 난다면 사업을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럴 수 있고, 물건을 사는 사람 역시 같은 돈 주고 물건을 사는데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업이나 물건 사는 일처럼 직접 경제적인 문제와 관계가 없는 경우에도 무슨 일이든지 손해는 안 보려고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결혼을 하려고 사람을 만날 때도 저 사람과 결혼해서 혹 손해 보는 것은 아닐까, 직장을 택하는데도 내가 그 직장에 들어가서 손해나지는 않을까, 직장에서도 내가 그 일을 맡으면 손해 보지 않을까, 심지어는 이런 저런 일로 사람을 만나면서도 이 사람과 알고 지내다가 손해나는 일은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각박한 세상이 된 것 같다. 아마도 이것이 바울이 본받지 말라고 한 이 세대의 풍조(롬 12:2)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마 5:39-40)"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룩한 책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거룩한 말이지, 이 말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사람은 아마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우리의 현실과 이 말씀을 비교하면서 생각해보면 단지 거룩한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룩한 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유익이 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우리들의 삶을 완벽하게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혼 상대를 택할 때도 가능한 나에게 맞는 최선의 사람이 누굴까 고민하며 택하고, 직장이나 직업을 택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나의 기대가 완전히 만족되는 것도, 또 그렇게 되리란 보장도 없다. 그래서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면 으레 손해 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결혼이든 직장이든 시작하면서 자신이 나름대로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임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남편 (혹은 아내)가 완전치는 않지만 함께 사는 동안 어떤 영역에서는 "내가 희생하지" 라는 각오로 결혼에 임하고, 또 직장 역시 나에게 완전한 직장이나 최선의 직업은 아닐지 모르지만 어떤 영역에서는 "내가 희생하지"라는 각오로 임한다면 그 결과가 다르다. 우선 심리적으로 편하다. 내게 불합리하거나 불리한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손해 보았다고 느끼기보다 원래 생각했던 희생의 연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 밖에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희생과 손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생각없이 오셨다가 지셨다면 아마도 "괜히 이 땅에 내려와서 손해만 보았다"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희생을 각오하시고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구속사역이 우리의 삶에서 그리 먼 것은 아니다. 결혼을 기다리며, 또는 직장을 구하거나 직장 내에서 일을 맡을 때 한번 쯤 흉내를 내보자. 영적인 만족은 물론 생각지 않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에이, 괜히 손해만 봤네!"라고 탄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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